말라버린 무화과 나무(20160320 박철규 목사)

작성일
16-03-21 07:32
조회수
2,234
작성자
관리자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2016320일 주일 박철규 목사

본문 막11:20-25

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날입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하고 평화를 상징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이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하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겸손으로 오신 평화의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입성 하실려고 문밖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린 안에 들어 와야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무리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환호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후에 다시 성을 나가 베다니에서 하루 밤을 주무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면서 열매 없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저주하였습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베다니에 가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성에 들어오면서 보니 어제

저주했던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여 뿌리가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는 우리의 정서에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한번도 저주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살리는 사역만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해 한 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만 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 자신이 배가 고파 먹을려고 하는데 열매가 없어 저주를 하여 나무를 말라

죽게 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맺힐 시기도 아닌데

왜 예수님이 열매를 구하였으며 열매가 없자 저주를 하였을까?

전능하신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고 실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본문의 말씀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한 분명한 영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잎사귀가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형식주의는 극에 달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의 열매를 맺지 않고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심판하겠다는 강한 메시지가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주님은 신앙의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참된 예배의 회복입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가 아니고

신령과 진리로 온 열정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가중 중요한 것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형식만 남아 있었습니다.

성전 안은 장사치들로 엉망이었습니다, 성전 안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들어 성전의 정화작업을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처소로서 정화작업을

하신 것처럼 성전된 우리도 신앙의 정화작업을 하여 형식과 의식을 버리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보시고 예배형식은 있으나 저들 속에 거룩한 산 제사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성도 각자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이 신령과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만 남아 있으면 우리도 무리들처럼 호산나 호산나 하다가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고함치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한 마음으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님이 기대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본문 22-23절에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때로는 목사님을 믿고, 부모님을 믿고, 선생님을 믿고,장로를 믿고

집사를 믿고 신앙 생활하지는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교회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장소의 종교가 아닙니다. 곳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때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역사하는 카이로스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다니면서 예수 믿지 않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믿는 시늉만 내고 형식만 따르는

무화과 잎사귀 교인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 나무가 될 것이다 경고합니다.

본문 23절에 기도하는 것 그대로 믿고 살아라 그러면 그 기도대로 이루어진다 약속하십니다.

믿음의 열매가 있고 믿음의 기도가 있으면 우리 앞에 가로막힌 산과 절벽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는 많은 산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문리적으로는 그 산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고 믿음의 열매를 맺으면 그 믿음대로 산이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믿음의 생활은 아닙니다. 선하게 사는 것도 믿음의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은 믿음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믿음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믿음과 삶은 일치해야 하고 삶과 예배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에게 믿음의 열매가 맺힙니다

 

24절에는 기도의 열매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 전체에서 24절만 떼어서 억지로 암송하고 해석하지 말고 문장 전체를 보면서 주님이 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매일 기도만 하고 있습니까? 남에게 보일려고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형식주의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 일대 일로 소통하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자처럼 정한 날 ,정한 일시에 손을 들고 하는 형식주의 기도는 버리라고 말합니다.

참된 기도는 기도하면서 감사하고 이미 받은 줄로 믿고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신앙이지만 믿음의 열매와 믿음의 기도가 있으면 성장하여 새가 깃드는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예배의 열매를 맺고, 믿음의 열매를 맺고

기도의 열매를 맺어 주님 십자가에 동참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크리스찬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진실되이 믿고 믿음으로 살아 기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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