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정이 성공과 알곡 성공(20140611 김용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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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29회 작성일 14-06-11 14:38본문
쭉정이 성공과 알곡 성공
2014년6월 11일 갈릴리 수요경건회 김용복회장
본문 시126:5-6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저는 우리 나이로 올해 만82세입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오늘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일을 하고 있는 여러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1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오면서 사랑하는 손자에게 물었습니다. 거제도에 가서 강의를 하는데 기쁘게 갈려고 하는데
좋은 것이 없느냐고 하니 할아버지 수수께끼를 낼테니 맞추어 보세요
금은 금인데 가장 좋은 금은 황금입니다. 다음은 소금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직원이 맞추면 5만원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입니다, 예 맞았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지금이 가장 비싸고 좋은 금입니다.
이 순간이 항상 현재의 나의 모습이고 나의 삶입니다.
나는 1933년 5월에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 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찌들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그것도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가득하던 시절에 태어나 젖도 먹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해방되던 해 나이가 12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나 나는 영양부족으로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형이 당시 좌익쪽의 사람들 심부름을 한번 했는데 그것이 죄가 되어 경찰서에 붙잡혀 갔습니다.
그러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지니 경찰은 좌익쪽 사람들을 재판없이 공개 처형했습니다.
형도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했습니다.
형이 좌익에 연루되었다는 것 때문에 연좌제에 묶여 당시 공립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립중악교 2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퇴학당하였습니다.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그 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나는 가출 8일만에 부산에 도착하여
구걸을 하면서 거지같은 생활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구걸로 방황하다가 어느 날 내가 가는 길에 미군 지프차가 타이어가 빵구나서 서 있었습니다.
저들은 어린 나를 불렀습니다. 나는 짧은 영어로 저들과 대화가 되었고 열심히 도왔습니다.
저들이 가는 길에 나는 필사적으로 메달렸습니다.
저들은 미극동군 통신연대 소속이었습니다. 나는 저들을 따라 들어가 철조망 안에서 하우스보이가
되었습니다. 성실하게 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하우스보이 37명 중에 가장 나이가 적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전라도 출신이라고 구박도 받고 많은 치욕도 겪었습니다.
전라도 촌놈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당시에 들었던 욕들이 내 마음에 내 가슴 속에 깊숙이 꽂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받았던 충격과 고통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고향을 떠날 때 두가지 큰 꿈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돈을 많이 벌어서 땅부자가 되어야겠다. 물론 여기서 땅은 논과 밭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돈을 벌어 장학사업을 하여 나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못배운 사람들에게 배우도록 도움을
주어야 겠다 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돈을 많이 벌고 난 후에 가능하겠지만....
나는 45세까지 하나님 없이 쭉정이로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대단한 성공을 하였지만 실상은 쭉정이 성공을 하였습니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취직하여 열심히 영어를 배웠습니다.
특무상사의 눈에 띄어 곧 특무상사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습니다.
성실함과 정직함이 부대장의 눈에 띄어 곧이어 부대장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부대장에게 청하여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어린 나이에 운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하우스보이 생활을 미군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여 졌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따라 성공이라는 개념은 다릅니다.
어린 청소년 때 가슴에 품은 꿈이 희망이요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의 목표가 됩니다.
어릴 때 꿈과 희망은 때 묻지 않고 순수합니다.
그 꿈을 어른이 되어서 이룬 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20대가 될 때 군에 갔습니다.
운전기술이 있어 병기창에 배속되고 병기창 부대장(대령)의 운전수가 되었습니다.
영어를 잘 하니 군단장(별 셋)의 운전병이 되었습니다.
군단장을 수행중 미군 수석고문관 (미군 별 하나)의 눈에 들어 수석고문관의 운전병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원조를 받던 상황으로 수석고문관은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운전도 잘하고 목표지에 빨리 가고 영어도 잘 하니 발탁이 된 것 같습니다.
속담에 되로 배워 말로 풀어 쓰는 사람과 말로 배워 되로 풀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전자에 해당됩니다.
당시에 나는 공식 학력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군부대에서 영어를 배우고 운전을 배우고
그러고 나니 세상 가운데 우둑 서게 된 것입니다.
고사에 상천운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구름이 하늘을 덮어도 뚫고 올라가면
맑은 태양을 보게 됩니다.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사의 땅 사우디에 갔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사막에 배추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1년 내내 비 한방울 오지 않는 곳에 그것도 수분이 가득한 배추를 재배하겠다고
하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79년 4월 22일에 나는 최초로 배추를 수확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동에 진출한 많은 우리 근로자들에게 싱싱한 배추를
공급하게 된 것입니다.
땅을 더 넓혀 제2, 제3,제4 농장을 확보하여 엄청나게 배추를 수확했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저를 불러 세계 최고의 농부라고 극찬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정부로부터 농업인으로는 최초로 석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달러를 벌어 들이고 대한민국 국위를 선양했습니다.
나의 두 번째 꿈은 이렇게 사우디에서 점차 열매를 맺어 갔습니다.
나는 고국에 와서 나의 꿈 100만평을 사기 위하여 전국 여러 곳에 땅을 샀습니다.
고향 강진에 110만평의 간척지 땅을 시세보다 2~3배 비싸게 하여 현금으로 구입했습니다.
당시에 현금 9억을 주고 매입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치로는 9000억 정도 될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간척전문가를 초빙하여 땅을 새롭게 개간하고 정리하여 새로운 농장을 조성했습니다.
간척지를 살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조롱했습니다.
간척비용으로 10억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나의 두 번째 꿈도 이루어 졌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해 오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학생들이 지금은 판,검사도 있고 기업인도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직원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동업자의 사기가 발생했습니다
직원들의 반란과 동업하던 사우디인의 농간으로 현지에서 좇겨나게 되었습니다.
동역하던 직원들의 내부 쿠테타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술도 많이 먹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던 것처럼 참담한 상황이 되어 가방 하나 들고 사우디에서 올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날 외사촌 형수가 나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아내도 불교신자였는데 참담한 상황에서 형수를 따라 벧엘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안수기도를 받는데 갑자기 눈물 콧물이 쏟아지면서 회개가 터지고 시편126-5,6절의 본문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쭉정이로 살았는데 이제 이후로는 알곡으로 살아가는 계기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다시 사우디로 가서 모든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농장을 다시 시작하여
큰 성공을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전부 모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머리 속에 든 것(지식, 학식,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전자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후에는 후자의 사람으로 살아 갈려고 합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내려 놓으려고 합니다.
자식과 자녀들에게 결코 물려 주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충분한 지식과 자립을 시작하는
시점(대졸)까지는 도와 줄 것입니다.
먼 훗날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이 내게 물으면 용복아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흙농사, 사람농사, 사랑농사를 짓다가 왔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김용복 박사는 흙의 사람으로 흙을 사랑하는 농부이면서 훌륭한 교육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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